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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궁』 속 안경 장인, 정말 있었을까? (1) - 조선시대 '애체'의 유래와 문화적 충돌

by 해와달과별과함께 2025. 5. 12.

조선시대 ‘애체’의 유래와 문화적 충돌

이 글은 사극 『귀궁』 속 등장인물 ‘애체장인’ 설정에서 출발했습니다.
드라마의 상상력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요? 조선시대 안경과 그 장인의 실체를 문헌을 통해 추적해봅니다.


'애체'의 기능적 의미 강조

🏛️ 조선시대 안경과 ‘애체장인’, 실제로 존재했을까?

조선시대 사극 『귀궁』에는 "애체장인"이라는 흥미로운 직업이 등장합니다.
안경을 제작해 궁궐에 납품하는 인물로 묘사되며, 드라마 전개에 중요한 축을 담당하죠.

그런데 정말로 ‘애체장인’이라는 직업이 역사적으로 존재했을까요?
애체(靉靆), 즉 조선시대의 안경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제작되었고,
그 기술을 가진 장인들은 누구였는지—
이번 글에서는 애체의 유래와 조선의 문화적 수용, 그리고 그에 얽힌 상징과 충돌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문화 전파의 시작 지점

✔️ ‘애체(靉靆)’란 무엇인가 – 조선시대 안경의 명칭

조선시대에는 ‘안경’이라는 단어 대신 ‘애체(靉靆)’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지봉유설』과 『성호사설』에 따르면, 애체는 “눈이 어두운 자가 작은 글씨를 보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흐릿한 시야를 맑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 한자어로, ‘애채(靉彩)’, ‘애희(靉曦)’ 같은 유사 명칭도 병용되었습니다.


일본 경유설 시각화

✔️ 서양에서 조선까지: 마테오 리치와 명나라, 그리고 일본 경유설

애체는 서양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명나라 황실에 선물한 서양 문물로 전해지며,
이후 중국을 거쳐 조선에 유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에 등장한 시기는 16세기 말~17세기 초, 명나라 북경을 통한 유입이 유력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경로로는 일본을 통한 간접 유입설도 제기됩니다.
『지봉유설』에는 일본 승려가 안경을 착용하고 있는 장면을 조선인이 신기하게 바라보았다는 기록이 등장하며,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가 새로운 통로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정조 실록 일화 시각화

✔️ 조선은 왜 안경을 경계했을까? – 예법과 신분의 충돌

조선 사회에서 안경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예(禮)는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 가치였고,
공식 석상에서 안경을 쓰는 것은 무례하거나 불경한 행위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정조실록』에는 정조가 시력이 나빠졌음에도 신하들 앞에서는 안경을 벗고 업무를 봤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이는 조선 사회가 안경을 실용성보다는 신분과 예의에 따라 제한적으로 수용했음을 보여줍니다.


안경이 지식인의 상징이 되었음을 표현

✔️ 안경의 사회적 이미지 변화 – 신기한 물건에서 지식인의 상징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안경은 점차 지식과 권위의 상징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지식인과 양반 계층은 안경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권위를 표현했고,
특히 중년 이후 노안이 시작되는 시기의 학자들에게는 필수품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애체가 조선에서 단순한 외래 물건이 아닌,
실용성과 상징성을 모두 지닌 고급 문물로 자리 잡았음을 말해줍니다.


📌 정리 요약

  • ‘애체’는 조선시대 안경의 명칭으로, 서양-중국-조선 경로를 통해 유입
  • 『지봉유설』을 통해 일본 승려로부터의 간접 유입 가능성도 제기됨
  • 초기에는 예법에 어긋나는 물건으로 제한적으로 수용됨
  • 점차 지식인 계층의 상징으로 정착하며 위상 변화

🔜 다음 글 예고

👉 다음 편에서는 실제로 조선에서 안경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경주 남석 렌즈와 대모 안경의 비밀을 파헤쳐봅니다.

이 글은 2025년 5월 기준, 역사 문헌과 최신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사극 『귀궁』 속 설정은 창작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실제 역사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 다음 글: 조선 안경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2) 렌즈와 테의 정밀 세계